약초관찰여행 제 126부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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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대체의학 제 7기 및 총동문회 2010제천국제한방Bio엑스포, 청풍호 및 청풍문화재, 단양팔경, 고수동굴 기념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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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놓은 논바닥의 흙덩이를 부수거나 바닥을 판판하게 고를 때 사용하는 기구인 "써래"

왼쪽은 걸려있는 것은 소가 곡식을 함부로 뜯지 못하도록 소의 입에 쒸우는 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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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눈금이 새겨져 있고 추가 매달려 있는 저울인 "대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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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이나 싸리 등으로엮어 만들어 물건을 넣고 어깨에 메고 다니는 바구니들인
"다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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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골집 마루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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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행사나 소의 여물을 끓일 때 사용했던 무쇠솥인
"쇠죽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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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인 "디딜방아", 안쪽 오른쪽은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도구인 "키"

이에는 한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서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의 옛 고구려 무덤의 그림으로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며, 이 방아는 근래까지 전남의 해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디딜방아의 분포지역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대륙, 인도네시아 등지의 도서 지역, 일본 ·네팔 ·인도 등이지만, 양다리방아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나란히 설치하여 쓸지언정 한국처럼 양다리방아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양다리방아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공이로는 나무, 돌을 쓰지만 나무 공이 끝에 겉을 우툴두툴하게 만든 쇠통을 끼우기도 한다. 확으로는 작은 돌절구를 땅에 묻으며 천장에서 늘인 새끼줄을 쥐고 방아를 찧는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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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얹어 등에 지는 운반도구인 추억의 "지게"

그 당시 우리 민족이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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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수공업적인 도구인 "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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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장독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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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를 보면 옛날 구수한 된장국과 매운 고추장으로 햇쌀밥을 비벼서 먹던 생각이 들 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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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두렛상 위에 사기그릇인 종지와 밥그릇들이 올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 반 잘린 사진은 물동이나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얹는 기구인
"또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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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엌은 박을 쪼개서 만든
"바가지"가 걸려있고, 석유나 식물기름으로 불을 밝혔던 유리 사각형의 "호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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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마루에 쌀을 담아두는
"두지"와 곡식을 양을 측정하는 "말"
여러가지 음식물, 그밖의 것을 담거나 음식을 버무리는 등에 쓰는 "함지박"
휴대용 병으로서 물, 술, 약 등을 넣어서 사용하던
"호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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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소의 먹이인 여물을 담아 먹이던 구유 그릇인 "소여물통(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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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의 양철통을 매달아 물을 길어 나르는데 쓰는 추억의 "물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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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위에 박넝쿨이 올라가 자라고 흰 박꽃이 피고, 아직 작은 어린 박이 매달려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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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 뒤쪽에는 둥근박이 영글어 음식 그릇을 만들 정도의 크기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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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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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근접한 석불앞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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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부(
都護府)로 들어가는 제아문(制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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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가를 관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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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인의 해설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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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또가 죄인을 벌하기 위한 장면을 형상화한 모습
"
청풍 금병헌(淸風錦屛軒)"

 해설: 1976년 12월 21일 충북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청풍부의 동헌(東軒)으로 부사(府使)가 집무하던 곳이라 하나 확실치는 않다. 부속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조선 말에 붕괴되어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 본래 청풍면 읍리에 있던 건물이다.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吳道一)이 창건하였다. 그후 숙종 31년(1705) 부사 이희조(李喜朝)가 중건하였으며,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朴弼文)이 다시 옮겨 개축하고 당(堂)의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고, 1983년 충주댐으로 인한 수몰을 피해 청풍문화재단지 내에 이건하였다. 건물 내부에 청풍관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현판 글씨는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이 썼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목조기와집이다. 전면 1칸은 마루를 깔고 뒤로 들여앉혀 방을 들였는데, 왼쪽 2칸은 마루에 난간을 둘러 마치 누각처럼 꾸몄다. 총건평 40평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였다.

이 지역 관아건축 중 유일하게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로 당시 행정관의 검소한 생활 단면을 보여준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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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와 동헌 사이에 있는 터인 "의청각(義淸閣)"

고을을 찾아 온 손님을 맞이하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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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528호
"한벽루(
寒碧樓)"

1971년 1월 8일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건립되었으며 석축토단(石築土壇)의 덤벙주초(柱礎) 위에 엔타시스를 사용한 층하주(層下柱)를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다. 팔작지붕으로 주심이익공(柱心二翼工) 보 머리 끝에 봉황머리를 별조(別彫)하고 중설(重舌)은 길고, 앙설(仰舌)도 길게 빼내고 연화(蓮華)를 얹었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형 익랑(翼廊)을 달고 익랑의 주초는 덤벙주초 위에 4각 석주를 얹고 그 위에 8각 기둥을 받쳤다.

누각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편액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淸風寒碧樓’라 명(銘)한 액자가 있고 창석(蒼石) 이준(李晙)의 중수기가 있다. 중수기에는 ‘崇禎甲戌郡守權璥刱’이라 적혀 있는데 이 해는 1634년(인조 12)에 해당한다. 한벽루는 이보다 앞서 1397년(조선 태조 6)에도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고, 그 후 1870년(고종 7)과 1900년(광무 4) 중수되었다.

1872년 대홍수로 도괴되었던 것을 1875년 원래대로 복원하였고,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어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놓았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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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화재단지에서 내려다 본 모습 하늘높이 솟아오르는 수경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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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배경에 국화꽃이 만발한 모습이 아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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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길 언덕을 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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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위에 높이 솟아오른
"관수정(觀水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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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동산을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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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이 핀 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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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이 만발한 산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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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령 국화꽃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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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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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국화꽃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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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화재단지 정상 망월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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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화재단지 주차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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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호 유람선 선착장인
"청풍나루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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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을 타기 위해 내려오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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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선착장에서 청풍현수교를 뒤로 하고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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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 드디어 승선하여 갑판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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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청풍현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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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드디어 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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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의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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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현수교를 지나서 배가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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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바위와 소나무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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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청풍호의 바람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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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갑판위에 다리에 걸릴 위험 때문에 배의 철탑 안테나를 반쯤 뉘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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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붉은색의 철로 만든 아름다운
"옥순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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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교를 유람선을 타고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사진

충북 제천시 청풍면과 단양군 단성면을 잇는 다리이다.


201~250장 사진 감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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